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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부리까마귀 Jungle Crow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담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 시인의 [자작나무]는 백창우의 수수한 목소와 가장 어울리는줄 알았습니다.

이런!

자작나무가 큰부리까마귀와도이렇게잘 어울릴 줄이야!

자작나무는 자체가 기름덩어리라인류가 기름을 발견하기 전까지 등불의 원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결혼을 뜻하는 '화촉'의 '화'는 자작나무를 뜻합니다.


올 4월에 조금 먼 북쪽을 다녀왔습니다.

위의 큰부리까마귀는 백두산에서 만난 새입니다.


한 번 읽고 단념하고

두 번 읽고 맹세했소

목단강 건너가며 보내주신 이 사연을

낸들 어이 모르오리

성공하소서

오빠라고 부르리까

선생님이 되옵소서

사나이 가는 길에 가시넝쿨 넘고 넘어

난초 피는 만주땅에

흙이 되소서

밤을 세워 읽은 편지

밤을 새워 감사하며

여자의 마음 둘 곳 분 접시가 아닌 것을

깊이 깊이 깨달아서

울었나이다

옥단강을 처음으로 중국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공항 입구에 덩그러니 쓰여 있는 석자, 옥단강

[옥당강의 편지]는 조명암이 작사를 하고 박시춘이 작곡한 것을 이화자가 부른 곡입니다.

과거의 황량한 만주땅을 생각하니 이 노래가 더욱 애절하고 쓸쓸하게 다가옵니다.

지금의 척박한 이 땅에 모란(옥단)이 꽃을 피우기에는 어려울 듯 보였습니다.

때론 진실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구슬프게읊조리는 이 노래는모두 친일성을 가졌던 두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신라의 달밤], [낭랑 십팔세],[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서울], [전우여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이런 훌륭한 곡들이 박시춘의 작품이라니 더욱 가슴이 저립니다.

박시춘, 조명암모두 음악 분야에서 친일 인명 사전에 올라와 있더군요.

어느덧 서정시에서

오염된전쟁의 군가로 둔갑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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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당강의 비틀림은 계속됩니다.

[옥단강 편지]는 1975년 전 국민의 마음을 녹이게 한

[처녀 뱃사공] 노래의 복사본을 만들어냅니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에 스치면

군인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낙동강 강바람에 앞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가슴 물경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어머님 그말씀이 수줍어 질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처녀 뱃사공]은 실제 인물 박말순(23세), 정순(18세) 두 처녀가

군에 입대 후 소식이 끊긴 오빠, 박기중(6.25 때 전사)를 대신하여

교대로 나룻배를 저어 길손을 건네주며

오빠를 기다리고 있는 사연을

유랑근단장 윤부길이 작사를 하였고 한복남이 작곡하여

황정자가 1959년에 불러 세상에 알여진 곡입니다.

[장미빛 스카프]를 부른 가수 윤향기는 바로 윤부길의 아들입니다.

표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곡은 애저린 사연의 시에 몹쓸 짓을한 것이죠.



.

.

시원스레 맘의 문을 열고 나갈 길을 찾아요 더 행복할
미래가 있어 우리에겐 우리들이 항상 바라는 것 서로가
웃고 돕고 사는 것 이젠 함께 하나를 보며 나가요

.

.

서태지가 왜 [발해를 꿈꾸며]라는 제목으로남북 통일의 노래를 불렀을까요?

도대체 발해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발해는.....

위의 사진은 [상경용천부]의 [상경터]입니다.

발해 최대 전성기 때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발해 5경 중의 하나가 바로 상경 용천부입니다.

나중에 거란이 발해를 멸하면서 이곳에 수도를 세웠죠.


상경용천부에서 만난 방울새입니다.

쓸쓸한 마음을 조금 달래주었던 반가운 만남이었습니다.


상경용천부는 현재 쓸쓸하게 성터와왕궁터만 남아 있습니다.

1933~4년에 일본 동아고고학회에서 이곳을 발굴하면서부터

1200년 동안 묻혀있던 발해문화와 역사의 속살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발굴되는 유물을 가지고 중국이어느 정도로 발해의 역사를 가공할지 지켜보고자 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통해 곧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중국 역사로 둔갑할수 있다고 하니...



[대조영]

상경용천부 근처에 허름하게 지어져 있는 박물관에 걸려있는 무릇 대씨 대조영(?~719)입니다.

고구려인이며 발해(698-926)를 세운 왕(699-719)입니다.

해동성국, 당나라가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로 칭한 이름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하며 러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니 발해의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그렇다면..

서태지가 [발해를 꿈꾸며]라는 제목으로남북통일을 위해 부른 이유는

바로 남북이 하나되어옛 발해가 펼쳤던 찬란한영광을 되찾자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흑륭사]




고구려 문화의 전통이 잘 전달되었다는 흑륭사에 있는 발해의 석등입니다.



석등 옆에서 재잘거리던 참새들입니다.




만주벌판의 쓸쓸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옛 역사는 뜨거웠습니다.

해동성국이 멸망한 이유중의 하나로거론되는 백두산을 향해 여정을 이어갔습니다.

백두산은 946~947년에 폭발했다고 합니다만 발해가 멸망한 926년과 너무 가깝습니다.

거란이 발해를 정복한 후 바로 발해를 떠났고 500년간 발해의 땅이 공황상태 였다고 하니 살짝 타당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두만강을 향해 가는 길은 대부분은 이런 회색들었습니다.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문시에서 처음으로 만난 두만강입니다.

두만강의 이름을 잃어버린 듯 해서 잠시 씁쓸했습니다.


두만강 바로 뒤가 북한땅입니다.


[중조국경지대]

우방국인 중국인도 북한을 가기위해서는 이 좁은 길을 건너야 합니다.


물자 교환은 이 철로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이곳의 까치만이 아무런 장벽없이 왔다갔다 할 수 있습니다.




두만강 관광 부두 바로 옆 건물에서 조선족문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도문에서는 또한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를 볼 수 있습니다.

학교 안에 걸려 있는 1930년대 숭실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뒷줄 맨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입니다.

윤동주와 문익환의 너무도 달랐던 길은 제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걸 제가 다 맛을 보았답니다.

일단 많이 주고 보는 중국 음식 문화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별걸 다 팝니다.

제가 보기엔 고물 중에 고물인데 이들한테는 필요한가 봅니다.


백두산 입구입니다.

이곳에서는 장백산이라 부르죠.






장백폭포의 우람한 모습입니다.

봄이지만 여전히 꽁꽁 얼어있는 눈이 영겁의 세월동안 쌓은 것처럼 두꺼워 보입니다.



두만강 수원을 그냥 보고만 올 수 없었습니다.

막걸리 마시듯이 꿀꺽꿀걱 들이켰습니다.

물색이 너무나 좋고 깨끗해서제 마음의 독이 싹 없어지는 듯 했습니다.


드디어 오른 곳 천지입니다.



어제까지 눈으로닫혔던 천지가이날은 확 열리면서 저를 안았습니다.

더이상의 감동 표현은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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